새벽 네시에 잠이 깼다. 전날 빗속에서 고생한 것 치고는 컨디션도 좋았다. 미얀마에 와서 워낙 적게 먹고 다니니 숙면을 취하는 건가, 고민하며 뒹굴거리다 중국풍과 일본식이 뒤섞인 식당으로 향했다. 네 종류의 빵과 버터, 볶음국수, 프라이드에그, 햄, 짜조, 과일과 커피, 오렌지 주스가 호사스럽게 놓여있었다. 바간에서의 제대로 된 첫 식사였다. 빵은 부드럽고 버터는 진했다. 딸기잼이 너무 달고 셔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별다른 감흥을 주지 않는 커피를 두 잔이나 마시고 일어섰다.
전기바이크에 시동을 거는데 배터리 경고등이 들어왔다. 어제의 폭우 탓에 방전이라도 된 건가, 바퀴를 질질 끌며 바이크샵으로 갔다. 배터리가 없어요. 주인아주머니는 다행히 내 얼굴을 못알아보는 것 같았다. 흔쾌히 깨끗한 바이크를 하나 꺼내주셨다. 벌써 세 대째, 이번에는 흰색 바이크였다. 우와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이고 2번국도로 향했다.


고작 이틀뿐인 일정이지만 대충 둘러볼 생각은 없었다. 구글맵에 표시해둔 사원과 탑들을 꼼꼼히 짚어나갔다. 어제의 첫 사원을 지나자마자 우측으로 보이는 나가욘 사원으로 들어섰다. 11세기 후반 세워진 사원은 두겹으로 된 입구와 부처를 보호하는 거대한 뱀 – 아마도 나가겠지 – 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네 방향의 부처를 뵙고 돌 위에 잠든 댕댕이를 들여다봤다.

다시 마누하사원이 있는 마을을 지나고, 몇 개인가의 사원들을 돌아보고 밍갈라 제디 파고다의 정문으로 향했다. 어제 반대 방향에서 봤던 정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있었다. 본의 아니게 폐를 끼쳤네, 고개를 숙이고 올드바간으로 향했다.




본격적으로 파고다군이 나타났다. 어디를 돌아봐도 온통 파고다였다. 지평선까지 수 없는 파고다가 이어지고 있었다. 이 많은 파고다를 다 보려면 한 달은 머물러야할 것 같았다. 이래서야 끝이 없겠네, 큰 곳 위주로 봐야겠네, 슈웨구지 파고다로 방향을 잡았다.

좁은 길을 따라 한참을 달리니 거대한 사원이 나타났다. 12세기에 세워진 짯빈뉴 사원은 높이 64m로 바간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왼편으로 고개를 돌리니 목적했던 슈웨구지가 보였다. 일출, 일몰 포인트로 유명하다더니 슈웨구지도 큰 사원이었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넓은 경내에 기념품을 파는 아주머니들이 보였다. 신발을 벗어 한쪽에 두는데 한 아주머니가 말을 걸어왔다. 타나카 발라줄까? 어, 이걸 남자도 바르나, 당황스러워서 와하하, 웃으니 아주머니가 따라웃었다. 아, 왜, 이쁠 것 같은데.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다시 와하하 웃었더니 뒤에서 구경하시던 아주머니들이 따라웃었다. 나중에 해볼게요, 뒷걸음질을 치자 오케이, 오케이 아주머니가 짖궂게 웃었다. 유쾌한 분들이구나, 손을 흔들고 사원 안쪽으로 들어갔다.


네 방향의 부처를 뵙고 바람이 불어오는 통로에 앉으니 멀리 새와 다람쥐가 보였다. 자세히 보니 둘 사이에 밥이 놓여있었다. 새와 다람쥐가 사이좋게 밥을 나눠먹고 있었다. 동물들끼리도 공양하는건가. 생각이 복잡해졌다. 반대편으로 짯빈뉴의 높은 파고다가 눈에 들어왔다.

슈웨구지를 나와 계단을 내려오니 상점가였다. 바지를 좀 사볼까 두리번거리는데(어제 산 Japanese Quality 바지는 폭우 속에 맥 없이 찢어졌다), 가게에서 젊은 아가씨가 뛰어나왔다.

바지 필요하지 않아?
맞아, 필요해.
이리 와봐. 좋은 걸로 줄게. 이거 너한테 어울릴 것 같아.
어디 보자, 이거 얼마 짜리야?
육천. 하지만 두 개 사면 깎아줄게.
좋아. 다른 것도 보여줘.
이거 어때? 이거 잘 어울린다.
아, 사실 난 보라색이 싫어.
왜? 보라색은 행운의 색이야.
하지만 난 싫어.
다들 보라색을 좋아해!
너 사실 다른 색 바지 없지?
어어.. 아냐. 저 뒤에 있어. 이거 봐, 많이 있잖아. 보라색이 좋은 거여서 추천한거야.
하하, 이거 두 개 살게. 검정색과 파란색.
하나 더 사. 세 개 만팔천이지만 깎아서 만육천에 줄게.
난 두 개면 돼.
하지만 세 개에 고작 만육천인데? 아냐, 만오천 어때?
난 두 개만 필요해. 두 개 살게. 얼마야?
음, 만이천.
너 아까 할인해준다고 했잖아. 일만에 줘.
만천, 플리즈.
음, 알았어, 만천.
고마워. 넌 좋은 손님이야. 친절하네.
좋은 바지 고마워. 근데 사진 한 장 찍어도 될까?
물론, 한 장에 천이야. 하하.
하하. 정말?
안녕, 이제 갈게.
좋은 하루 보내길 바래.
그래, 너도 좋은 하루.
안녕.
손을 흔들고 바이크를 세워둔 곳으로 향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