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제주올레를 걸을 때는 정말 무지하고 용감했다. 장비라고는 트래킹화 하나로 매일 한 코스 반 또는 두 코스를 걸었다. 문제는, 도착한 날 중산간에서 신발이 다 젖어버렸다는 거다. 열심히 말렸지만 대책이 없었다. 발 여러 군데에 물집이 잡히고 까졌다. 술도 엄청 마셨다. 게스트하우스 스탭들과 냉장고를 털기 일쑤였고, 다음날 채워 넣은 술은 또 마셔버렸다. 낮에는 상한 발로 걷고 밤에는 부어라 마셔라했으니 몸이 성할 리가 없었다. 서있기도 힘든 발 때문에 가장 긴 4코스를 건너뛰었다. 이번에 오면서 4코스를 채워야겠다고 생각했고, 그게 둘째날의 일정이 됐다.

4코스는 표선에서 시작해 남원까지 이어지는 19.6km 구간이다. 숙소 앞에서 버스를 타고 가다 친구의 조언이 생각났다. 해와 바람을 등지고 걸어야죠. 어제는 동에서 서로 걸었는데, 계속 맞바람이었다. 오늘은 그러지 말자 생각하고 남원에서 내렸는데,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결국 또 맞바람을 맞으며 걸었다.

남원포구는 5코스 종점으로 잠깐 왔던 곳인데, 기억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방파제 사이의 윤슬을 보며 표선 방향으로 출발했다.

계속 마음을 빼았던 윤슬

제주에 억새가 이렇게 많은 줄 몰랐고, 억새와 바다가 이렇게 어울리는 줄도 몰랐다.

처음 제주올레를 걸을 때 폐공장이 정말 많아서 놀랐었다. 성산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해안도로가 그랬는데, 이쪽도 그랬다. 낡은 것들을 좋아하지만, 제주올레와 폐공장이 어울린다고 말하기는 어려운데.

공장 앞에서 장난꾸러기들을 만났다. 한참을 쓰다듬어주니 그제서야 만족하고 집으로 뛰어갔다. 밥때라도 된거냐.

길가 기념품샵에는 춘식이도 옥희도 출근하지 않았는데, 가게 앞의 댕댕이가 다가왔다.


주인을 찾습니다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니, 일주일 째 동네를 헤매고 다니길래 잠시 보호하며 주인을 찾는단다. 설마 버림받은 건 아니겠지, 찬 것이 얹힌 것 같았다. 착한 녀석은 마냥 사람이 좋기만 하다. 한참을 쓰다듬어주고 잘 지내라 돌아서는데, 저쪽에서 달려오는 흰 트럭을 본 녀석이 무작정 따라 뛰기 시작했다. 위험해! 쫓아가서 타이르는데, 어쩌면 녀석의 주인이 흰 트럭을 탄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대체 어쩌면 좋을까.

녀석과 헤어져 걷는 바다는 아름답기만 하다. 그래서, 더 속상했다.

끝없이 바다로 난 것 같던 길은 중산간으로 이어졌다. 예쁜 카페를 만나 점심을 먹었다.




제주에서 나는 재료로 만들었다는 케익이 맛있었다. 커피는 평범했지만, 좋은 공간이니 그저 고마웠다.

골목을 따라 다시 길을 재촉했다.

이런 곳에서 사진관을 하면 행복할까, 잠시 생각에 빠져들었다.

한 봉지에 천 원 또는 이천 원. 이 계절의 제주는 귤로 넘쳐나는 곳이다. 어디에도 귤이고, 사람들이 인사 대신 귤을 건넨다.


채광 좋은 카페를 만나 기웃거렸지만, 다행히 쉬는 날이었다. 하마터면 커피를 또 마실 뻔 했다.

대신 바다로 난 테라스 의자에 잠시 쉬었다.

길은 다시 바다로 이어졌다. 표선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뭍에 올라온 배에 잠시 정신이 팔렸다. 왜 이렇게 사족을 못쓰는 걸까.

어스름이 내리는 바다는 점점 더 파래졌다. 멀리 한라산도 흐려졌다. 모레는 다시 맑아져야 할텐데.

바다로 이어진 길을 따라 걸었다.

낚시하는 분의 풍경. 방해가 되지 않도록 셔터를 누르고 돌아섰다.

다시 표선으로 향했다.

더욱 파래진 바다와 억새의 풍경

늘어지던 그림자

오늘의 미션도 완료다. 스템프를 찍고 춘자싸롱으로 국수를 먹으러 갔다.

곱배기 오천원. 오늘의 보상이다.

차창 밖으로 지는 해를 보며 숙소로 돌아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