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저래 바쁜 한해를 보냈다. 전국으로 돌아다녔지만, 항상 일에 쫓기고 풍경을 볼 겨를이 없었다.
연말이 다가오는데, 휴가도 잔뜩 남았다.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 잊고 지내던 올레길을 떠올렸다. 가보자, 결심한지 2주일, 어느새 제주 하늘을 보고 있었다.

제주의 첫 인상은 항상 야자나무였다. 마침, 하늘도 구름도 햇빛도 열대에 어울리는 무드다. 오길 잘했구나.

제주를 정말 많이 왔지만, 버스를 탄 건 손에 꼽을 정도다. 대학생 때, 그리고 지난번 올레길 정도니 고작 세번째다. 제주를 남북으로 잇는 버스의 풍경은 꽤나 근사한데, 왜 이걸 몰랐을까 싶어졌다.

서귀포에서는 한라산이 보인다. 제주에서 볼 때보다 더 잘 보이고, 더 아름답니다. 왜 한번도 보지 못했을까 생가하며 도시락을 사러 갔다.

요즘 핫하다는 김밥집인데, 그냥 김밥이다. 특이한 건 새벽 6시에 열고, 오후 2시면 닫는다. 산객을 위주로 장사를 하는 걸까.

숙소에 짐만 던져두고 바로 걷기 시작했다.
오늘은 제주올레 7코스다. 올레 사이트에는 길이 15.7km라고 나와있지만, 공사구간과 사유지 횡단 금지 등 이슈로 실제 길이는 17.3km다. (다 걷고나서 알았다.) 파란색 올레 화살표는 정방향을 가리킨다.

리본도 눈여겨봐야한다. 역시 파란색은 정방향, 주황색은 역방향이다.

우리가 서귀포에서 기대하는 풍경이겠다. 커다란 야자나무와 파란 하늘. 오늘 원없이 볼 생각이다.

걸으면서 알게 된 건데, 7코스는 (아마도 8코스도) 내내 한라산을 보면서 걷는 길이다. 눈쌓인 한라산을 홀린듯 보다가, 계획에 없던 한라산 입산을 예약했다. 눈쌓인 백록담이라니!

11, 12월은 제주도민들이 가장 바쁜 시기란다. 모두가 감귤을 따야해서, 심지어 병원에도 안간단다. 두달 쯤 농활이나 해볼까, 생각이 들었다.

작은 오름이지만, 풍경이 바뀌었다. 가기를 잘한 것 같은데, 한편으로는 긴 산행이 괜찮을까 걱정도 됐다. (겨울 한라산은 가본 적 없다.) 어쨌든 근사한 풍경이라면 가까이에서 봐야겠지.

길은 다시 바다로, 외돌개로 이어진다.

올레길 곳곳에 예쁜 카페들, 이름나지 않은 음식점과 숙소가 많다. 흔한 관광지와는 달리 특색있는 곳이 대부분이다. 천천히 걸어야 만날 수 있는 곳들이다.

숲을 따라 조금 걸으니 너른 바다가 나왔다. 그리고, 바다를 가득 채운 윤슬.

정작 외돌개는 꽤나 심심한 풍경이다. 어쩐지 입장료를 받지 않더라.

파란 하늘과 야자.

다시 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작은 정원과

좁은 골목길을 지나니

야자나무가 늘어선 길이 나왔다. 역시 서귀포가 좋다.

빛바랜 나무와 어울리는 공간이 있었다. 주인장이 계셨다면 잠시 머물렀을텐데.

섬에서 바라본 섬

법환포구에서 제주 사는 친구를 만나 같이 걷기 시작했다. 친구의 어릴적에는 이 포구가 수영하는 곳이었단다.
해녀체험 같은 것이라도 하는 걸까, 묘한 이름의 공간 뒤로 어느새 범섬이 가까워졌다.

길은 돌길을 지나 강정으로 이어진다. 올레길 대부분이 걸을만 한데, 사실 현무암 해변을 걷는건 곤욕이기는 하다. 뾰족뾰족하다보니 지압이나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고, 발목에 꽤 무리가 간다.

다시 한라산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풍경을 매일 보며 사는 삶은 어떤 것일까, 궁금했다.

올레패스는 시작점, 중간지점, 종점 세 군데에서 찍어야 하는데, 중간지점을 자꾸 빼먹는다. 이날도 2km를 돌아가서 다시 찍었다. (결국 못 찍어서 다시 가야하는 곳도 한 군데 있다.)

중간지점을 빼먹게 만든 장본인이다. 미묘에 홀려서 정신이 팔렸었다.

반가운 파란화살표

지친 얼굴이 눈에 밟히셨는지, 지나치던 어머님께서 귤을 하나씩 쥐어주셨다.

강정에 도착했다. 저항의 흔적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저항의 시대는 끝났지만.

묵묵히 셔터를 누르며 지나쳤다. 무슨 말을,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군항은 위협적일만큼 큰데, 정작 전함이 들어오는 일은 거의 없단다. 그렇다면 왜 굳이, 이렇게까지 크게 만든 걸까.

멍하니 쳐다보다 정신을 차리니 교회였다. 미군들을 위한 교회란다. 물론, 모두에게 행운은 필요하다.

역새가 자란 강정바다는 눈물겹게 아름다웠다. 긴 탄식이 나오는 풍경이다.

오늘의 종점 월평을 향해 걸어갔다. 어느새 해가 뉘엿하다.

검푸르게 변해가던 바다

종점 스템프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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