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럴 때가 있다. 뜬금없이 술 한잔 하다가 밤새 마시게 된다던지, 방심하고 시작한 일이 너무 커져서 감당을 못한다던지 하는 때 말이다. 감악산에 오르던 날이 그랬다. 별 생각 없이 출발했다가 오후를 꼬박 보내게 됐다.

범륜사만 보고 돌아가기는 아쉬워서, 온 김에 정상에나 가볼까 출발한게 이 사단의 시작이다. 애초에 2km 남짓한 코스라 방심한게 문제겠다.

숯가마터를 구경한 것 까지는 좋았는데, 이어지는 이런 길을 만났다. 아무리봐도 등산로가 아닌 것 같은, 대충 계곡 물내려오는 길 같은 그런 길이었다. (나중에 안 일인데, 감악산은 파주, 양주, 연천에 걸쳐있다. 그래서인지 등산로 정비는 거의 되어있지 않다. 서로 떠미나?) 표지도 없고, 흔한 산악회 리본도 안보여서 어째야 하나 고민하는데, 사진 우측 바깥쪽 경사로로 등산객들이 내려오는 걸 봤다. 아, 저긴가보다 싶어서 경사로로 방향을 잡았다. 그리고…


이 계단을 만나기까지 근 1시간을 산속을 헤맸다. 애초에 길이 없는 곳을 등산객들이 기어내려온 것이었고, 그걸 되짚어서 난 기어오른 것이다. 결국 덤불속과 계곡을 가로지르고 나서야 계단을 찾을 수 있었다.

산악회의 리본은 늘 반갑지만, 안도의 한숨이 나온 건 처음이었다.

그나저나 벙커가 상당히 많았다. 임꺽정의 본거지였다더니 애초에 전투에 유리한 산인가보다.

얼마 남지 않은 기운을 모아 걷다보니 눈 앞에 계단이 나타났다.

그래서 올라보니…

갑자기 탁 트인 풍경이 나타났다. 어쨌든 산에 오르는 건 이 순간을 위해서다.

멀리 보이는 풍경이 더 근사해서 그쪽으로 가봤는데,

아무래도 좀 이상한 길이었다. 봉우리를 넘어서 철제 난간을 잡고 기어가야 하는.

그래서 넘어가보니 장군봉이었다.

길이 계속 이어지는데 멀리 전망대가 보였다.

임꺽정봉이었다. 그래, 난세를 내려다봤겠다.

풍경은 (당연히) 더 근사해졌다. 어쨌든 기진맥진해도 계속 올라가는 이유다.

결국 감악산 정상에까지 갔다. 2km 정도면 올 거리를 대체 얼마나 헤맨 걸까.

어쩐지 진흥왕순수비가 있었다.

연천군에서 가져다둔 원시인들도 있었다.

성모마리아도 계셨지만, 가보지는 않았다. 아니, 못가봤다.

물도 없고, 여유를 부리다가는 산에서 밤을 맞게 생겼다. 다시 부지런히, 서둘러 내려가기 시작했다.

사진 물도 없이 걸은지 2시간 만에, 드디어 약수터를 만났다. 왜 약수터라 부르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만남의 숲 표지판도 만났다. 이리로 올라갔으면 1시간이면 정상이었다. 그렇게 가고 싶던 만남의 숲이었다.

만남의 숲에 어울리는 의자들도 있었다.

아주 그냥 평상도 있고.

산악회 형제자매님들, 산악회라면 여기저기 길을 안내할 만한 곳에 리본을 걸어둬야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장식으로 달아두지 말구요.

당이 떨어져서 범륜사로 돌아갔다. 입구에 커피 시주하는 분이 계셨었다. 보살님은 퇴근하시고, 자리를 지키던 냥냥이가 끝났다고 성질을 부렸다. 알았어.


얼떨결의 산행을 마칠 때 쯤, 산에는 어스름이 지기 시작했다.



